'남북 유엔동시가입' 30년의 빛과 그림자

发稿时间 2021-09-15 06:00
 

[주재우 경희대 교수 ]


[주재우의 프리즘] 오는 17일은 우리나라가 유엔 가입한 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북한도 우리와 동시에 가입했다. 우리가 북한보다도 더 긴 여정 끝에 일궈낸 결실이라 더 유의미하다. 30년이 지난 오늘 이 과정을 회고하면서 그 의미를 재평가해보려 한다. 그때 보지 못한 손익계산이 오늘날 한반도의 국제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1949년에 옵서버 국가로 유엔 대표부를 설치했고 이를 주미대사가 겸직했다. 당시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1948년 12월 유엔 결의안195호가 대한민국 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했기 때문이다. 1951년에는 유엔에 옵서버국 상주대표부를 설립했다.
우리는 1949년부터 1956년까지 유엔 가입 신청을 5차례 했으나 중국이 아닌 소련의 반대(veto)에 막혀 번번이 실패했다. 당시 대만이 중국을 대표해 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유엔 가입 신청 심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15개국이 한다. 이 중 9개국의 찬성을 얻어야하는데 그중 5개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미국, 러시아(소련), 영국, 프랑스와 중국이 전원 찬성해줘야 한다.

이에 반해 북한의 유엔 가입 신청은 거의 불가능했다. 유엔이 북한을 한반도의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엔이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을 중심으로 수립되었기 때문에 소련과 몇 개의 위성국가 외에 모두 친서방, 친미 국가가 회원국의 주류를 이뤘다. 따라서 북한은 가입 신청부터 한반도 관련 문제를 제기하는 데 제3국을 통해야만 했다. 유엔에서 북한의 대리인은 중국, 소련과 제3세계 국가 등이었다.

1953년 이후 중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국가 등의 발의로 유엔총회는 1960년과 1964년을 제외하고 매년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3개 안건에 대한 논의를 빠지지 않고 개최했다. 상정된 3개 안건이란,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보고 및 동의건,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해산 건과 한반도에서의 유엔과 모든 외국군의 철수 문제 등의 의미를 담은 유엔 사령부의 해체였다. 즉,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와 유엔 사령부의 해체가 북한의 절대적인 의제였다.

이를 위해 특히 중국이 백방으로 나섰다. 중국의 지원은 1971년 7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의 중국 비밀방문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진행됐다. 이후 미·중관계 정상화 협의과정에서 키신저의 협의대상이던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겸 외교부장은 북한의 유엔관련 사안을 미국에 설득시키고자 노력했다. 1975년까지 이러한 논의와 협상은 계속 진행되었다.

1975년에 논의가 중단된 이유는 미·중 양국의 국내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1974년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했고 이듬해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의 ‘4인방’에 의해 정치적인 탄압을 받아 외교 일선에서 물러났다. 게다가 그의 병증이 위독해져 사실상 협상에 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덩샤오핑이 그를 승계했다.

북한의 주장이 모두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절반의 승리’는 거둘 수 있었다.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UNCURK)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7일 제5차 유엔 총회의 결의안으로 채택되었다. 이는 성격상 이른바 ‘한국문제’를 담당했던 유엔한국임시위원회(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및 유엔한국위원회(United Nations Commission on Korea)를 계승한 후속 기구였다.

북한이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를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정부의 정당성을 유엔이 인정하고 유엔사와 유엔군의 주둔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이 위원회는 6·25전쟁 중에 결의안이 통과됐고, 사무처도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설립됐다. 미국은 당시 유엔군의 승리를 전망하면서 38선의 부당성을 강조하면서 한반도 전체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통일된 민주한국정부가 대의제를 수립하고 파괴된 경제를 재건하는 데 유엔이 도움을 줄 것을 역설했다. 이러한 임무의 수행을 동 위원회 설치의 당위적 목적으로 설명했다.

결국 미·중 양국은 1973년에 동 위원회 해체에 동의하게 된다. 미국이 유엔사의 존속과 미·중관계 정상화를 위해 타협한 결과였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유엔사 해체는 최선을 다해 막아야 할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리고 이를 중국과의 협상에서 철저하게 방어했다. 키신저의 설득력이 있었는지 저우도 이를 수용하게 된다. 당시 불안한 한반도 정세와 주변국의 한반도 전략을 고려해 내린 결과였다. 중국에게 가장 우려스러웠던 것은 유엔사 해체가 한·미동맹관계에 미칠 영향과 이로 인한 일본의 군사적 움직임이었다.
중국은 6·25 전쟁 이후 북한과 함께 유엔사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를 외쳐댔다. 그러나 미·중관계 정상화 논의가 시작되면서 일본에 대한 대안이 없이는 시기상조임을 감지하게 된다. 주한미군 철수로 조장될 수 있는 한반도의 권력공백이 일본의 군사적 야욕에 도화선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전략적 계산에서 중국은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역할과 기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으로 선회한다. 그러면서 유엔사 해체에 관한 논의는 미·중 간의 주요 의제에서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1973년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6·23 선언)”을 발표했다.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와 통일 이전까지 잠정적으로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남북이 서로 반대하던 유엔동시가입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첫 단추가 꿰어졌다. 물론 북한과 사회주의진영의 나라들은 이를 반대했다. 특히 중국의 반대가 강력했다. 중국이 ‘두 개의 중국’을 부정했기 때문에 북한의 ‘두 개의 한국(조선)’ 거부 입장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 문제는 답보상태로 남아왔었다. 1980년대 말 냉전이 종결되면서 기회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도 이때부터 유엔가입을 발 빠르게 준비했다. 1990년 9월 소련과의 수교로 우리는 소련의 찬성표를 확보했다. 문제는 중국이었다. 이규형 전 주중대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의 입장을 중국에게 알리자 중국 측에서 이를 유보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회고했다. 이듬해에 할 수 있는 메시지로 우리 외교 당국은 중국 측의 의미를 해석했다.

우리 외교 당국의 판단이 옳았다. 1991년 중국은 우리의 유엔가입신청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하는 입장을 북측에 전달했다. 5월 3일 방북한 당시 리펑 총리가 연형묵 총리에게 반대 입장의 유지가 더 이상 어렵다며 남한이 먼저 가입한 후 북한의 가입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남기고 갔다고 태영호 전 북한공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리고 북한도 마지못해 우리와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이에 성공했다.

유엔은 우리의 안보와 한반도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때문에 우리의 성공적인 가입은 고무적인 사건이었고 우리 외교에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가 과거를 돌이켜보고 선택한 결정의 의미를 되새기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유의미한 지침서라는 통념에서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을 평가하는 것도 유의미한 작업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하나는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문제와 관련이 있다. 다른 하나는 주변국의 대북 영향력 감소와 연관된다.

우선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 회원국으로 인정받음으로써 국제사회에 이제 ‘두 개의 한국(조선)’이 공인된 것이다. 남북한 모두가 주권국가로 인정받은 셈이다. 따라서 통일의 해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특히 평화적인 통일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주권이 존중되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할 것이다. 이제 무력통일의 방식은 최소한 비(非)합법적이라는 인식을 남북한이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문제인 주변국의 대북 영향력 감소 문제는 북한이 국제사회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확보한 것과 연관이 깊다. 특히 북한의 적대진영 국가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우선 북한에게 유엔 진출은 북한 외교관이 미국에 상주할 수 있고 미국에 사무실을 열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한다. 북한이 가장 대화하고 싶은 나라가 미국인 점을 감안하면 북한의 유엔 진출은 그들에게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이미 1973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하면서 7월에 뉴욕에 유엔대표부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반도문제 논의의 장에 옵서버국으로 초대되었다. 그러면서 북한은 6·25전쟁 이후 원하던 미국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해 미국과 첫 관방회의 개최라는 외교적 쾌거도 올렸다. 그 이전까지 북한은 수없이 미국과의 대화를 시도했지만 접촉경로를 정확히 알지 못해 번번이 고배를 들어야 했었다. 물론 북·미 첫 관방회의는 뉴욕에 주재할 북한 외교관과 공관개설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으로 한반도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북한은 제3국을 통해 대화의사를 수없이 미국 측에 전하려 했다. 때로는 동구권, 때로는 중동, 또 때로는 서남아시아의 지도자를 통해 대화 의지를 알렸다. 그러나 북한은 그 누구보다도 중국에 의존을 많이 했었다. 특히 미·중관계 정상화 논의로 양국 고위급인사의 만남이 빈번해진 것을 이용한 것이다. 역으로 중국은 북한의 이런 갈망을 대북 영향력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북한이 유엔에 가입한 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미국과의 대화를 위해 더 이상 다른 나라의 중재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이를 스스로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고 역량도 갖추게 되었다.

모든 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득이 있으면 실이 있고, 긍정적인 이면에는 부정적인 것도 존재한다.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은 무력통일방식을 최소한 불법화시켰기에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점에서 가치가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분단의 고착화와 북한의 외교적 입지를 넓혔다는 관점에서는 우리와 주변국의 대북 영향력 축소를 부정하기 어렵다.
 
 

주재우 필자 주요 이력 

▷베이징대 국제정치학 박사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중국연구센터장 ▷브루킹스연구소 방문연구원 ▷미국 조지아공과대학 Sam Nunn School of International Affairs Visiting Associate Prof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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